못 된 도깨비 수장 이야기-장난을 넘어 악(惡)이 되어버린 최후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도깨비는 메밀묵을 좋아하고, 밤새 씨름을 즐기며, 때로는 사람에게 속아 금 은 보화를 내어주는 어딘가 익살스럽고 정겨운 존재입니다.

하지만 아주 먼 옛날, 깊고 습한 태백산맥 자락에는 그런 도깨비들과는 전혀 다른 무리가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을 이끄는 수장의 이름은 흑 각(黑角).

머리에 난 외 뿔이 숯처럼 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오늘 들려드릴 이야기는 인간의 탐욕을 먹고 힘을 키우다가, 결국 자신의 욕심 때문에 파멸을 맞이한 어느 도깨비 수장의 전설입니다.

못 된 도깨비 수장

1. 메밀묵 대신 사람의 운을 훔쳐 먹던 도깨비

보통의 도깨비들이 짓궂은 장난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면, 흑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사람의 운(運)과 기억을 빼앗는 도깨비였습니다.

흑각이 다녀간 마을은 서서히 생기를 잃기 시작했습니다. 풍년이 들던 논 밭은 메말랐고, 총명하던 아이는 하루아침에 기억을 잃어버렸으며, 화목했던 가족들은 사소한 일에도 서로를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절망하며 흘리는 눈물과 깊은 한숨은 흑각에게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술과도 같았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힘은 더욱 강해졌고, 산속의 다른 도깨비들마저 두려움에 굴복해 그의 부하가 되었습니다. 흑각은 수장의 권세를 이용해 부하들에게 더욱 잔혹한 장난과 악행을 강요했습니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에게 검은 뿔의 도깨비는 더 이상 장난꾸러기가 아니라, 반드시 피해야 할 재앙 그 자체였습니다.

2. 마을에 나타난 낯선 방랑 선비

그러던 어느 늦가을.

흉흉한 소문이 끊이지 않던 마을에 허름한 봇짐을 멘 젊은 선비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의 이름은 연(然).

연은 주막 한쪽에 조용히 앉아 마을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었습니다.

"또 흑각 놈의 짓이라더군. 김 씨네 소는 밤새 피를 토하다 죽고, 오늘은 최 참판 댁 곳간까지 텅 비어 버렸다네."

사람들의 한탄이 이어지자 연은 말없이 봇짐을 열어 작은 비단 주머니 하나를 꺼냈습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주머니였지만, 이상하게도 안쪽에서 붉은 기운이 은은하게 새어 나오는 듯했습니다.

연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제가 그 도깨비 수장을 만나보겠습니다. 이 주머니 하나면 충분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말렸지만, 연의 눈빛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습니다.

그날 밤, 그는 달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깊은 산속으로 홀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3. 탐욕을 미끼로 건 내기

산 중턱에 이르자 퀴퀴한 냄새와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길을 막아섰습니다.

짐승 가죽을 걸치고 노란 눈을 번뜩이는 흑각이었습니다.

"간도 큰 인간이구나. 제 발로 내 앞에 찾아오다니."

흑각이 시퍼런 도깨비 방망이를 들어 올리며 비웃자, 연은 미소를 지으며 허리 춤의 비단 주머니를 흔들었습니다.

"네가 인간의 운과 욕망을 먹는다는 흑각이냐? 이 주머니 안에는 세상에서 가장 짙은 인간의 욕망이 담겨 있다. 네가 지금껏 맛본 절망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강렬한 것이지."

흑각의 눈빛이 탐욕으로 번뜩였습니다.

도깨비는 본디 호기심과 내기를 좋아하는 존재였습니다. 아무리 수장이라 해도 그 본성 만큼은 거스를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장 내놓아라!"

연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냥은 안 된다. 내기를 하자. 네가 이 안의 욕망을 모두 삼켜 낸다면 내 목숨과 주머니를 모두 네게 주겠다. 하지만 견디지 못한다면, 다시는 산 아래로 내려오지 마라."

흑각은 인간 따위의 꾀에 넘어갈 리 없다는 자신감으로 크게 웃으며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4. 탐욕이 부른 최후

연이 비단 주머니를 던지자 흑각은 기다렸다는 듯 매듭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산을 뒤흔드는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습니다.

"크아아아악!"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것은 인간의 욕망이 아니었습니다.

그 안에는 맑게 닦인 거울 하나가 들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평범한 거울이 아니었습니다.

도깨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백마(白馬)의 생피가 거울 표면에 빈틈없이 발라져 있었던 것입니다.

주머니를 열어젖힌 순간, 흑각은 거울에 반사된 백마의 기운을 정면으로 마주했고, 그 뒤에 비친 자신의 흉측한 모습을 동시에 보게 되었습니다.

도깨비에게 백마의 피는 살을 태우는 맹독이자 저주였습니다.

끝없는 욕심에 눈이 먼 흑각은 결국 스스로 가장 치명적인 독을 눈앞으로 끌어들인 셈이었습니다.

그의 몸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고,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을 뒹굴기 시작했습니다.

5. 몽 당 빗자루로 남은 도깨비

연은 쓰러진 흑각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습니다.

"인간의 욕망을 탐하던 자가, 결국 자신의 욕심에 스스로 무너졌구나."

검은 뿔의 수장은 점점 몸집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악독한 기운이 모두 빠져나간 자리에는 뿔도, 거대한 몸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는 끝이 새까맣게 타버린 낡은 몽 당 빗자루 하나만 덩 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습니다.

숨어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다른 도깨비들은 혼비백산 하여 깊은 산속으로 달아났고, 그 뒤로 다시는 마을 근처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음 날 아침, 마을 사람들은 산 입구에 버려진 낡은 몽 당 빗자루를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연은 이미 흔적도 없이 마을을 떠난 뒤였습니다. 

그날 이후 마을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재앙이 사라졌고, 사람들은 다시 평화롭고 풍요로운 삶을 되찾았다고 전해집니다.

세상에는 힘으로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있습니다.

그러나 욕심에 사로잡힌 자는 결국 자신의 탐욕 때문에 무너지는 법입니다.

인간을 비웃으며 운명을 빼앗던 도깨비 수장 흑각 역시, 끝내 자신이 가장 얕잡아보던 인간의 지혜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혹시 깊은 산길에서 새까맣게 그을린 몽 당 빗자루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면, 함부로 손대지 마십시오.

전설에 따르면, 그 안에는 아직도 자신의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한 흑각이 새로운 희생자의 운을 노리고 잠들어 있다고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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