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빛 먹을 품은 선비, 윤회의 전설 (확장판)
옛날 옛적, 백두대간의 웅장한 산줄기가 험준하게 뻗어 내린 어느 깊은 산골 마을이 있었다. 그곳에는 '윤회'라는 이름의 가난한 선비가 살고 있었다.
윤회는 끼니조차 제대로 잇지 못해 늘 찢어지고 꿰맨 도포를 걸치고 다녔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보며 "글만 읽어 무엇하나, 밥 한 술 나오지 않는 것을"이라며 쯧쯧 혀를 차곤 했다. 하지만 윤회의 눈빛만큼은 밤하늘의 으뜸별처럼 맑고, 새벽 이슬을 머금은 잣나무처럼 청초했다.
그는 매일 해가 뜨기 전, 마을 뒤편 산기슭에 있는 널찍하고 평평한 바위에 올랐다. 그리고 바람이 나뭇가지를 간지럽히는 소리를 벗 삼아 묵묵히 붓을 들었다. 이상하게도 윤회가 글을 읽거나 그림을 그릴 때면 조용하던 산새들이 날아와 나뭇가지에 앉아 지저귀었고, 거칠게 불던 산바람마저 뚝 그쳐 조용히 숨을 죽이곤 했다.
하지만 윤회에게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은밀한 비밀이 하나 있었다. 밤이 깊어 마을의 모든 불빛이 꺼지면, 그는 방 한구석 깊은 곳에서 작고 까만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오묘한 빛을 내뿜는 벼루와 먹이 들어 있었다. 붓 끝에 먹을 묻혀 종이에 대는 순간, 검은 빛 대신 은은하고 신비로운 ‘옥빛(Jade)’이 종이 위로 감돌았다.
산신(山神)과의 인연, 그리고 약조
이 옥빛 먹에 얽힌 내력은 윤회의 어린 시절로 올라간다.
윤회가 아직 댓따마한 아이였을 때,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포수의 덫에 걸려 피를 흘리고 있는 어린 사슴 한 마리를 발견했다. 윤회는 망설임 없이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찢어 사슴의 상처를 매어주고, 겨우 덫을 풀어서 사슴을 산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그날 밤, 윤회의 꿈에 하얀 수염이 땅에 닿을 듯 긴 신비로운 노인이 나타났다. 노인은 자신이 그 산을 지키는 영물이자 산신이라 밝히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네 고결하고 따뜻한 성품이 나를 감동시켰도다. 이 작은 돌멩이를 주니, 힘든 일이 생기거든 벼루에 갈아 쓰거라. 이 먹으로 적은 글과 그림은 이 고을의 액운을 막고 풍요를 불러올 것이다. 단, 명심해라. 이 먹의 힘은 오직 욕심 없는 깨끗한 마음에서만 발휘된다. 만약 탐욕에 물든 자에게 이 먹이 넘어가면 큰 재앙이 내릴 것이니, 목숨을 걸고 비밀을 지켜야 한다."
잠에서 깨어난 윤회의 머리맡에는 정말로 작은 돌멩이 하나와 은은한 빛을 내는 벼루가 놓여 있었다.
그날 이후 윤회는 수십 년 동안 매일 밤 옥빛 먹을 갈아 글을 썼다. 그가 마을의 안녕을 빌며 글을 쓴 날이면 어김없이 가뭄 들었던 논밭에 단비가 내렸고, 전염병이 돌던 마을에 푸른 바람이 불어와 사람들의 병을 씻은 듯 낫게 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것이 그저 하늘의 은혜인 줄로만 알았을 뿐, 가난한 윤회 선비의 기공 덕분이라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
탐욕스러운 관아의 그림자
세월이 흘러 고을에 새로운 사또가 부임했다. 그는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 자신의 배를 채우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탐욕스러운 자였다.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또는 마을에 이상한 소문이 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난해서 폐가나 다름없는 집에 사는 윤회 선비의 집 근처만 가며 묘하게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가끔 밤중에 윤회의 집 창문 너머로 신비로운 푸른 빛이 새어 나온다는 이야기였다.
"흠, 한낱 시골 선비의 집에 무슨 보물이 숨겨져 있는 것이 틀림없다!"
욕심에 눈이 뒤집힌 사또는 관졸들을 이끌고 윤회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윤회의 허름한 단칸방을 샅샅이 뒤지던 관졸들은 마침내 벽장 깊은 곳, 이불 틈새에 숨겨져 있던 작은 목함을 찾아냈다. 목함을 열자 은은한 옥빛을 내뿜는 먹과 벼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놈! 네놈이 사사로이 이런 보물을 숨겨두고 나라의 기운을 어지럽히려 했구나! 당장 이 자를 옥에 가두어라!"
사또는 옥빛 먹을 빼앗고, 윤회를 어둡고 축축한 지하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윤회는 억울한 누명을 썼음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옥창 너머로 기울어가는 초승달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한숨을 쉴 뿐이었다.
"탐욕에 물든 손이 먹을 쥐었으니, 곧 재앙이 찾아오겠구나..."
푸른 연기가 되어 사라진 절개
다음 날 아침, 사또는 관아의 동헌에 앉아 이방과 관졸들을 모아놓고 호탕하게 웃었다.
"내 오늘 이 신비로운 먹으로 나의 위대한 공덕을 기리는 글을 크게 써서 임금님께 바칠 것이다!"
사또는 기세등등하게 벼루에 먹을 갈아 붓에 옥빛 먹물을 듬뿍 묻혔다. 그리고 커다란 비단 종이 위에 첫 글자를 써 내리려 붓 끝을 대는 순간이었다.
쿠쿵-!
갑자기 하늘이 노해 번개가 치듯 쿠르릉하는 소리가 울리더니, 붓 끝에 묻어있던 옥빛 먹물이 종이에 스며드는 대신 거대한 푸른 연기로 변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연기는 순식간에 매서운 폭풍우로 변해 관아 내부를 휩쓸기 시작했다. 탐욕스러운 사또의 얼굴로 거센 바람이 몰아쳤고, 관아의 기와장과 벽이 와르르 무너지며 쑥대밭이 되었다. 사또와 관졸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에 바빴다.
소란이 서서히 잠잠해진 후, 겁에 질린 관졸들이 윤회가 갇혀 있던 지하 감옥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감옥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그 안에는 윤회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윤회가 있던 자리에는 그가 평소에 쓰던 때 묻은 대나무 붓과 작은 먹통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영원히 마을을 지키는 '선비바위'
이상한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이 윤회가 매일 아침 글을 읽던 산기슭의 평평한 바위로 달려갔을 때, 모두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평평했던 바위의 모양이 변해 있었다. 마치 도포 자락을 날리며 붓을 들고 곧게 서 있는 선비의 뒷모습과 똑같은 형상의 거대한 바위가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비로소 깨달았다. 윤회 선비가 수십 년 동안 자신들을 위해 은밀히 복을 빌어주었던 영험한 인물이었음을, 그리고 탐욕에 맞서 자신의 고결한 절개를 지키기 위해 바위가 되어 마을을 지키기로 결심했음을 말이다.
그 후로 마을 사람들은 그 바위를 ‘선비바위’라 부르며 정성껏 모셨다.
세월이 흘러 사또는 그날의 공포로 병을 얻어 도망치듯 고을을 떠났지만, 선비바위는 언제나 그 자리에 남아 마을을 굽어보았다. 그리고 지금도 고을에 큰 가뭄이나 재앙이 찾아오려고 할 때면, 선비바위 주변으로 은은하고 아름다운 옥빛 안개가 피어올라 온 마을을 따뜻하게 감싸 안는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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